쓰고 싶어 끄적끄적

이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는데...

청주댁 2006. 1. 14. 23:02

 

10년도 더 지난 1994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겁도 없이 그해 6월 약국을 개업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대학병원 약제실에 있다가 내 길이 아니다 싶어 마침 집 근처 선배가 하던 약국이

출산때문에 매물로 나온지라 지르는 성격을 발휘하여 얼른 인수를 해 버렸다.

 

무슨 놈의 자존심과  생활력인지 아빠께 달라지도 않고 떡하니 은행에 면허증 넣고 생애 처음으로 대출받아 보증금 1000만원, 권리금 1000만원을 지불하고 아침 9시부터 저녁10시까지 젊은 혈기를 꽁꽁 묶어둔 채 한 4년을 그렇게 약국에만 갇혀 살았다.

 

나를 믿고서 근처 약국을 가지 않고 일부러 내려와 약을 지어 가시던 주민들,

그때는 그분들의 고마움을 미쳐 깨닫지 못하다가 요즘 그 근처를 지나노라면 일부러 아파트단지 앞의 동네약국을 지나쳐서 10분이나 걸어 내려와 내 약국을 찾아주신 분들이 얼마나 눈물나게 고마운지 모른다.

이후 신랑 약국에서 근무를 하였고 선배, 동기 약국을 거쳐 지금 있는 의약품 도매상까지 이력서를 쓰자면 한장은 족히 채울만하다.

 

인터넷에서 순위를 매긴 직장인이 원하는 바람직한 직장의 순위를 보면, 순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으나 유두리있는 업무시간, CEO의 자질, 직장동료와의 유대감, 자기성취감, 회사에서 제공하는 복지 혜택등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월급의 많고 적음이 오늘을 사는 샐러리만의 최고 목표가 아님은 분명하다.

 

나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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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라고 한없이 믿었던 삼년 전 약국에서도 하루 5시간 파트타임 근무였지만 쥔장들 여행때문에 꼬박 5일을 밤늦게까지 풀근무를 하고서도 막상 내가 여행을 가려 할때는 눈치를 주는 막되먹은 인간성에 분노했고 어떤 곳에서는 후배이지만 그곳에 본인이 더 오랫동안 있었다는 텃세에 학교선배라는 자리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었다.

 

삼 세번까지 참는다는 나의 엉뚱한 의지로 버티다 정리하고 나온 지금의 직장은 집 바로 앞의 동네로 차로 10분 거리라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올해 나에게는 딱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 의약품 특히 마약류나 생물학적 제제(백신)의 품질관리와 그와 관련된 서류정리를 하는 단순업무이지만 만일 약화사고 났을때 콩밥 먹을 각오를 하며 있어야 하는 위치였는데 운동회나 자모회등 점심모임이 있을때는 외출을 허한다는 입사 전 따뜻한 배려를 믿고 내 업무를 수행하며 그렇게 1년을 넘게 지내왔다.

 

그러던 10월의 어느날, 입사 전부터 서원대에서 영어회화 수업을 9시부터 9시 50분까지 듣고 있었고 그래서 출근시간 5분정도 늦을수 있다고 입사 전에 이미 양해를 구했고 실무자도 승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조건과는 달리 정시 출퇴근과 집안 애경사외에는 외출을 불허한다는 실무자의 억지에 억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론은 다른 직원들도 있고 형평성에 어긋나니 본인이 알아서 분위기를 파악한 후 아침 영어수업도 그만둘지 알았다고 하니 내가 순진한건지 뒤에서 욕하는 줄도 모르고 떳떳하게 아침마다 5,10분씩 늦었으니 얼마나 얄미웠을까?

 

점심 외출만 해도 어렵게 이야기 꺼내고 외출을 하려고 하면 정색을 하며 눈치 보지말고 직원들 아무한테나 행선지만 밝히고 다녀오라고 전 직원앞에서 선심쓰더니만 이제 와선 통보만 하고 다녔다고 꾸짖고 그런 날은 내심 미안하여 아침 출근을 1시간이나 30분 일찍 하였더니 왠일로 일찍 나왔나 했다며 이죽거린다.

 

아침에 출근 늦는것도 미안하여 퇴근시간 10분, 20분 늦게 가곤 했는데 그런것은 안중에도 없고 사무직 직원이 계셔도 내 직장이니까 애정을 가지고 우리집 장보러 마트갈때 회사 물품 챙겨서 커피나 종이컵등 물품까지 사다 날랐는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당연한걸로 여기고 나중에는 은행 심부름에 화장실 청소까지 하란다.

나 커피 마실때 좋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윗분들을 포함한 직원들...모두 남자들)도 타주었었는데 그중 어느 누구도 본인들 커피 탈때 내 것 챙기는 것 못봤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직장생활 한다는게 이런거구나 싶어 씁쓸한 웃음만 나온다.

나의 경우 그래도 약사면허증이라는 간판이 있는 전문직인데도 이러한데 보통 여자분들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무시를 당하며 직장생활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으니 마음이 아프다. 

 

선배들이 그런걸 여태껏 참고 있었느냐며 퇴사를 종용해도 참고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저번주 실무자의 변덕스런 감정의 기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들고 말았다.

그래서 2005년 12월 30일날이 마지막 출근날이 된 것이다.

 

처음 급여 조건과는 달리 준다던 명절 보너스도 안 줬다.

급하다고 해서 예전 직장에서 얼른 퇴사해서 입사했더니만 건물 허가가 늦게 났다며 일방적으로 첫 월급 안 줄때도 빙신같이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결국에는 쟤는 순딩이라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인식이 박혔는지 제 맘대로 대한다.

 

내 친구나 동기, 이웃사촌, 선후배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 비위 맞춰가며 영업하는 그네들이 처음에는 나한테도 깍듯하게 대했다가 돌변하는 걸 보니 돈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돈을 많이 벌든지, 다른 사람이 무시하지 못하게끔 출세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 직장에서 1년 반을 근무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삭막하고 인정이 메마른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힘과 돈밖에 없다는 것을 가슴속에 깊이 새긴 아주 의미있는 직장생활이었다.

오늘의 이 감정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이래도 끄덕 저래도 끄덕하는 성격이라 곧 잊혀질까 걱정이다. 

작은 아이도 입학하고 이것 저것 신경 쓸 것도 많아 당분간은 주변정리하며 지내려고 한다.

 

더불어 직장과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더럽고 치사해도 열심히 속끓이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아빠들과 직장 여성들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